2019년이었다. 추석을 즈음한 여행을 계획하며, 몇 개의 도시를 떠올렸고 뉴욕으로 결정했다. 떠나기 2주전, 디 파라(Di Fara Pizza)의 창업자 도메니코 디마르코(Domenico DeMarco, ‘돔’이라는 애칭으로 불리운다)와의 인터뷰까지 성사되었다. 더할 나위 없었다.
“최고중에서도 최고다 (The best of the best)”
故 앤소니 부데인(Anthony Bourdain) 셰프,
디 파라의 피자에 대해 말하며
맨하탄 42번가 고속버스 터미널 상가에서 장미 한다발을 사들고 우버에 올라탔다. 서울은 내가 사랑하는 도시이지만,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 곳이었다. 그 곳을 벗어나 뉴욕에 있다는 것만 해도 설렜는데 날씨까지 비현실적으로 예뻤다. 하늘은 정말 거짓말 같았다. 백화점 가전 코너에 살 수 없는 가격이 붙여진 최신/최대 사이즈의 삼성 TV에 성능을 뽐내려고 띄워 둔 태평양 저 어디 섬에 하늘 색깔도 이렇진 않았던 것 같았다. 이래서 ‘뉴욕의 가을’이라 했던가.
맨하탄의 항만들을 구경하며 이스트 리버를 건너니 한적하지도, 바쁘지도 않은 브룩클린의 J-애비뉴 귀퉁이에 내렸다. 11시 20분이었다. 바람대로 내가 처음이었다. 구글에 따르면 디 파라의 영업개시는 12시였다. 대기열이 시작되는 것부터 직접 보고 싶었다. 철망 셔터가 내려져 있던 이 뉴욕의 전설적인 피자집 창문 바깥에는 자갓(Zagat)을 비롯한 수많은 미디어 및 가이드북들의 인증 스티커가 무심하게, 무수하게 붙어있었다.

11시 30분이 되자 손님들이 몰리고 대기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동네 사람들은 광경이 전혀 낯설지 않은 듯 걸어서 지나쳤다.
12시가 되기 15분전, 디 파라의 창업자 도메니코 디마르코 옹이 불이 켜지지 않은 홀의 창가 자리에 앉는 것이 보였다. 햇볕이 쏟아지는 바깥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곧 인터뷰를 하게 될 그를 창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보는 것이 묘했다. 프라이드나 UFC처럼 큰 종합격투기 대회를 취재할때 메인 이벤터들을 예기치 않게 경기장 안의 통로나 화장실 같은 곳에서 마주칠 때 받은 느낌과 비슷했다. 안에서는 도메니코 옹보다는 젊지만 베테랑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바삐 오픈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기자들은 점점 늘어났고, 영업시작은 예상보다도 대략 20분 정도가 늦어졌다. 대기하는 그 누구 하나 불평을 하지 않는 듯 했는데 이것이 반갑게 놀라웠다. 오히려 기다리는 동안 안면을 튼 몇몇은 서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설명은 힘들지만 납득이 되었고 묘하게 안심도 되었다. 평소 어떠한 브랜드를 열정적으로 향유하는 층은 그 브랜드의 ‘브랜드 인격’과 궤를 함께하는 이들이라 생각해왔는데 그 장면이 그래 보였다.
양해를 구하고 대기줄에 서있던 몇몇의 입에 녹음기를 가져다 댔다. 이날 라인의 맨 앞에서 피자에 곁들일 와인병을 들고 있던 토마스는 척 보기에도 음식 애호가 같았는데, 역시나 미슐렝 스타 레스토랑의 소믈리에로 일하고 있다 말했다. 공교롭게도 교포였다.
“디 파라는 전통적인 뉴욕 스타일 피자 (Traditional NY style pizza)에요. 이 곳의 피자에는 그야말로 듬뿍 사랑을 넣어주죠. 많은 사람들이 조스(Joe’s) 피자나 롬바르디 피자에 디 파라를 비교하지만 이곳이 가장 유니크하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까지도 오너인 도메니코가 직접 피자를 만들었어요”
그 바로 뒤에서 기다리던 제프는 40대 중반의 금융인이었다. 브루클린 네이티브인 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이곳의 피자를 먹기 시작해서 여전히 이 곳을 찾는, 2세대 디 파라 팬이다.
“뉴욕에는 로베르타, 폴리 지 피자처럼 훌륭한 곳들이 많죠. 그럼에도 이 곳이 베스트인 이유는 모든 피자 하나, 하나에 신경을 쓴다는 것이에요. 클래식한 뉴욕 스타일 피자의 가치를 아는 이들이 이곳을 찾는다고 생각합니다”
12시 15분쯤, 안에서 분주히 일하던 한 사내가 밀가루가 묻은 티셔츠에 이마에 땀이 맺힌 채로 문을 열고 나왔다. 대기하던 이들의 시선이 쏠렸다. 도메니코의 아들 중 하나인 마이클 디마르코였다. 한 손에는 테이크아웃 커피컵을 쥐고 나온 그가 내려져 있던 케이지 셔터를 올리기 시작했다.

문이 한번 더 열리고, ‘Di Fara’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가지런히 머리를 묶은 한 명이 더 나와 오픈 채비를 도왔다. 인터뷰 일정을 협의했던 도메니코 옹의 딸이자, 7남매중 셋째, 디 파라의 매니저 역할을 하는 매기(Margaret DeMarco)였다. 인터뷰 섭외를 위해 전화를 할 때마다 인상적일 정도로 친절했던 그녀에게 가져온 꽃다발을 건네며 인사했다. 매기가 활짝 웃었다.
“꽃이 너무 예쁘네요! 정말 고마워요. 얼른 서둘러서 아버지와의 인터뷰를 시작할 수 있게 해드릴께요”
“아버지는 주방 안쪽에 계세요. 저를 따라오세요”
그녀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갔다. 오픈되어 있는 오븐 섹션을 지나 좁은 통로를 지났다. 내가 평소 우러러보는 식당 사업가들이나 뉴욕의 친구들이 이견 없이 뉴욕피자의 최고로 여기는 그 디 파라의 주방에 들어오다니, 이렇게나 쉽게. 조금 비현실적 경험이었다. 미 동부를 배경으로 한 범죄 영화들에서 와이즈 가이들은 항상 본인들의 아지트 같은 이탈리아 식당의 주방 안쪽을 들락대는데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몇 걸음 되지 않아 개수대와 선반이 있는 여유있는 공간에 다다랐다.
살라미를 자르고 있던 벽 반대편에는 바깥으로 통하는 뒷문이 열려있었다. 이를 통해 햇볕이 쏟아지던 그 자리에 도메니코 옹이 앉아 있었다. 피자에 관해서는 괴팍하다 느껴질 정도의 자부심을 가진 뉴요커들이 이견을 달지 않는 전설. ‘그’ 뉴욕에서 최고로 일컬어지는.
‘그’ 도메니코 디마르코. 1936년생, 이제는 건강 자체가 감사한 나이가 된 그다. 실제 얼마 전까지도 직접 줄기에서 바질잎을 잘라서 마르게리타에 올리고, 주둥이가 긴 은색 주전자로 피자위에 올리브 오일을 두르고, 피자를 자르던 아이콘. 이제는 주방 일에서는 물러난 듯했지만, 여전히 공간에 존재하고 피자를 만드는 과정을 목도하며 그 존재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몸은 야위었지만, 눈빛과 표정이 부리부리했다. 멋진 중절모에 수염과 안경까지 괜시리 더 멋스러워 보였다. 옹에게 인사를 건넸다. 매기가 나를 보며 눈을 찡긋하며 도메니코 옹의 귀에 대고 다시 한번 큰 소리로 얘기를 전했다.
“아버지, 서울에서 아버지를 인터뷰하러 온 사람이에요. 코리아, 사우스 코리아에서요”
그의 시선이 나에게로 옮겨졌다.
DD – 도메니코 디마르코
MD – 매기 디마르코
SL – 서울 렝구아
SL : 당신은 피자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이 뉴욕에서, 이견의 여지없는(Undisputed), 거의 도시 전설에 가까운 존재로서 존경받고 있는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요?
DD :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즐기지(I like what I do).

그가 강한 뉴욕-이탈리안 액센트로 단호하게 얘기했다. 질문을 이어갔다.
SL : 1965년에 문을 연 이래 현재 브루클린의 매장 하나만을 운영하고 계신데요. 왜 사업 확대를 하지 않았나요?
MD : 투자나 확장 제안은 정말 많이 받았어요. 하지만 그런 선택을 할 때는 정말 신중했어야 했죠(Had to pick and choose). 지금 제가 아버지의 대를 이어서 디 파라에서 해야하는 일은 이 아버지의 유산을 지속해 나가는 것(Keep this legacy going)이에요. 우리의 높은 수준과 레시피에 그 어떠한 흠결이나 오염도 원하지 않아요. 그것도 우리가 신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죠. 저희의 재료 수급의 문제도 있겠고요.
SL : 어르신, 당신이 여전히 디 파라의 주방에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DD : 그 누구도 나에게 일을 하라고 하지 않아요(Nobody makes me do what I do). 하지만 난 여전히 이곳에 나오고 있죠.
SL : 취재를 오기 전 많은 기사를 읽고 인터뷰와 영상을 보았습니다. 모두가 디 파라를 최고라고 얘기하잖아요. 최고라는 말에 이제는 예전 같은 감흥을 느끼지 못할 거 같기도 한데요.
MD : 전혀 그렇지 않아요. 우리가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우리를 그렇게 여겨주는 것이 나의 매일매일의 동기부여(Daily motivation)에요. 그리고 나는 우리 가족의 사업이 계속해서 건재할 수 있게 노력할 것이구요.
SL : 뉴욕이든, 서울이든 소위 대박이 난 오래된 식당에 가보면, 손님들을 맞이하는 오너들, 특히 2세대 째의 오너들에게서는 위화감이랄까, 이질감이 느껴질 때가 간혹 있어요. 물론 정말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친절한 반대의 경우도 많지만요. 당신은 확실히 친절한 경우 같습니다. 이 바쁜 식당의 업무와 대기행렬 속에서 어떻게 그런 여유와 미소를 유지할 수 있나요?
MD : 제 생각엔 우리 가족은 아주 스위트하고 친절하게 자란 것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집에서 그렇게 사람들을 대하라고 배우며 자랐어요.
SL : 원래 준비한 질문은 아니지만, 아버지 도메니코 옹은 어떠한 아버지였는지 궁금합니다.
MS : 굉장히 엄격하셨어요, 물론 좋은 의미로요. 항상 모든 일에 열정이 넘치는 편이세요. 사업이든, 본인의 삶이든, 또 가족에게든. 노력도 하셨겠지만 본인의 캐릭터나 성격자체가 그렇게 타고나셨던 것 같아요. 저는 그런 것들을 보면서 자랐구요. 비즈니스, 라이프, 가족, 모든것에 패션(Passion)이 있었죠. 항상 우리에게 ‘지름길은 없다(No shortcut)’고 말씀해 주시기도 했어요. 그게 아버지가 알려준 것이죠. 요즘 모든 사람은 빠른길, 지름길을 원해요. 그게 쉬우니까 그렇겠죠? 그럼에도 아버지께서는 사람들이 기다리게 되더라도, 천천히 가라고 말씀하셨어요.
SL : 요즘 대중문화 전반적으로도 그렇고, 셰프들 또한 본인들의 흥미와 ‘영감’에서 시작한 창의적인 요리를 내놓는 것이 대세인데요. 디 파라는 그런 흐름과는 정반대인 것 같습니다.
MD : 우리는 여전히 클래식한 것들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겨요. 이를테면 재료에요.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집에서 피자뿐 아니라 이탈리아 요리를 많이 했는데, 이때부터 ‘최고의 재료를 구할 수 있다면, 제대로 시작할 수 있다’고 항상 얘기하셨어요. 당신이 아무리 좋은 토마토 소스 레시피를 가지고 있더라도, 토마토가 좋지 않으면 무슨 소용일까요? 디 파라에서는 가능한 한 각 재료를 가장 좋은 것들로 쓰려고 해요. 토마토를 비롯한 몇몇 재료는 이탈리아에서 수입을 하고 있고, 바질은 콜롬비아와 이스라엘산을 씁니다.
SL : 5년을 버티기가 힘든 식당 사업, 50년을 훌쩍 넘겨 최고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그것도 다름아닌 뉴욕에서요. 이것을 가능케 하는 힘은 디 파라의 가치를 알고, 매일 문을 열기도 전에 대기행렬을 만드는 손님들 같은데요. 손님들은 당신에게 어떠한 의미인가요?
MD : 지금 시점에서, 그들은 손님이라기 보다는 거의 가족 같은 존재에 가까워요. 최대한 친절하려고 노력해요.
SL : 디 파라의 미래는 어떻게 예상하나요?
MD : 이 오리지널 로케이션 만큼은 영원히 유지하고 싶어요. 비록 이 브루클린의 건물은 나이가 많이들었지만요.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다른 지점들을 오픈할 수 있는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칠남매인데, 이제는 확장하고 다른 매장을 낼 준비가 된 것 같아요.
주) 2021년 현재 디 파라는 브룩클린 본점 이외에 두 군데(맨하탄 로어 이스트 사이드, 브룩클린 윌리엄스버그)에 더 매장을 열었다.
홀 쪽에서 전해지는 분주함이 주방을 타고 넘어 들어와서, 매기를 더 붙잡는 것이 민폐같았다. 마지막으로 할말이 없는지를 도메니코 옹에게 묻자 지체없이 대답했다.
“당신은 당신이 하는 일을 좋아해야 하지, 그 누구도 나에게 이곳에 나오라고 시켜서 나온게 아닌 것처럼.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야”
도메니코 디마르코, 디 파라 창업자

간단한 사진 촬영을 하고,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주방을 나서니 오픈 직후의 분주함은 비웃을 정도로 사람들이 가득했고, 바깥의 대기행렬은 오히려 더 늘어나 있었다.
오래된 디마르코 가족의 친구이자 주방의 중추적 역할인 디노, 매기의 오빠 도메니코 디마르코 주니어와 마이클 디마르코, 매기의 여동생인 루이즈 디마르코가 서너평 남짓한 주방에서 말 그대로 물 밀듯 쏟아져 들어오는 손님들의 주문을 다 해결하고 있었다. 베테랑 건맨들처럼. 그 와중에도 일하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고, 서로 농담을 계속해서 주고 받는 광경이 인상적이었다.




아까 인터뷰를 하며 안면을 텄던 소믈리에 토마스가 자리한 가장 안쪽 테이블에 껴 앉아, 녹음이 잘 되었는지를 확인하고, 마르게리타 피자를 베어 물었다.
많은 것이 납득되었다.
서울 렝구아의 시작을 생각했을 때 첫 인터뷰이(Interviewee)로 떠올린 것이 디 파라였다. 서울 렝구아의 탄생에 일조해준 뉴욕의 전설 디 파라의 도메니코 옹의 울림과 힘이 있던 코멘트들, 그리고 매기의 환대에 감사의 뜻을 보낸다. 언젠가 다시 찾을 날이 있기를.
서울에서,
서울 렝구아